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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 in London

홀로 즐기는 런던


내 생각에 런던은 하루 / 평생 / 혼자 / 둘이 / 가족과 함께 / 단체 패키지 여행으로 가던지 간에, 왠지 나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듯한 여행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환경이 갖추고 있다. 그런 문화적 자원이 풍부한 도시가 세계에서 몇 안될 것 같은데, 런던은 신기하게도 어떤 성향의 사람이 가도 항상 만족과 영감과 행복을 주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잘 아는 여행법은 바로 내가 홀로 거리거리를 방황하며 겪은 런던이다. 일반적인 외출의 process는 이랬다.

1. 몰스킨, 카메라, 책 한권, 화장품, 핸드폰을 담은 가벼운 숄더백을 어깨에 걸고, 지금 문을 열고 나가면 내 앞에 London이 펼쳐진다는 행복감에 큰 숨을 들이 마시고 길을 나선다. 물론 몰스킨에는 내가 오늘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으며, 이 정보란 목적지에서 기대할 수 있는 특별한 것 (예를 들어 서점, 쇼핑, 카페, 박물관, 도서관 등)과 관련된 영업 시간과 연락처, 제일 즐거울 walking route, 비상시 제일 빨리 집에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말한다. 사전 준비를 잘 했다면 가는 길 중간 중간에 들를 만한 관심 장소를 찍어 두고 가는 길에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빠른 페이스로 걸으면서도 잘 아는 지역에서 벗어나게 되면 틈틈이 목적지로 잘 가고 있는지 지도를 확인하고, 동시에 새로 만나는 지역의 분위기나 나중에 가고 싶을 만한 관심거리를 적어둔다. 목적지가 있지만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나타나면 주저않고 새로운 목표물을 향해 마음을 쏟는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테니까. 갈등이 된다면 아쉬운대로 멋진 사진들을 찍어 가슴에 남기고 다음을 기약하며 원래의 목표물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한다.

3. 목표한 곳에 도착해서 그 곳을 눈으로, 머리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영감을 받았다면 사진을 찍고 떠오르는 메모를 한다. 하지만 억지로, 또는 단지 routine이기 때문에 사진을 찍거나 아무거나 적지 않는다. 내 카메라와 몰스킨은 그런 피상적인 겉치레에서부터 자유일 수 있는 공간이고,  내 감정과 느낌을 담고 있어야 한다.

4. 무언가 많이 느끼고 있을 때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내 머리에게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주고 대개 이 때 생각나는 누군가에게 엽서를 쓴다. 이 때 '그 누군가'는 한국에 돌아갔을 미래의 나일수도 있다. 엽서의 목적은 수신자에게 행복을 주기 위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므로 목적을 꼭 달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5. 돌아가는 길, 출출해졌으면 근처 편의점, 또는 힘이 많이 떨어진 경우에는 PAUL에 들어간다. 내 몰스킨에는 당연히 근처에 있는 PAUL이 어디 있는지 적혀 있다. PAUL에서는 쵸코 마카롱, 편의점에서는 쵸코 하나를 챙긴다. 몇시간 걷고 관광하느라 에너지가 다 떨어지면 생각이 마비되기 때문이다.

6. 너무 늦지 않았으면 근처에 있는 서점에 들른다. 요새 인기가 많은 책이 뭐가 있는지 훓어보고, 다음에 갈 목적지는 이 때 런던 여행서적을 뒤적거리며 생각해낸다. 이렇게 하면 따로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도 끊임없이 여행의 연속을 즐길 수 있다.

7. 안전을 항상 유의하며 큰 길로 다니고 많이 늦었을 경우 버스에 탄다. 안전에 유의한다는 것은 밤에 혼자 다니면 괜히 말을 걸어오는 (사실은 harmless 하지만 오늘 나의 소중한 경험을 잊게 만들고 내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간혹 있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가 안좋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자세와 눈빛등:)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한다. 또한 저기 앞에서부터 술에 취한 듯한 남자들이 몇명 걸어온다면 핸드폰으로 친구에게 전화해서 집중하며:) 통화하며 지나친다.

8. 오늘 찍은 사진들, 적은 내용을 다시 곱씹어보며 경험을 머리속에 되살린다. 벌써 걸어오는 길에서 든 새로운 수만가지 생각들 덕분에 일부는 두뇌에서 자체 편집을 했을 것이다. 기억이란 것은 원래 내일이면 더 흐릿해지고, 시간이 흐르면 오늘 있었던 일이 마치 아예 없었던 것처럼, 無로 돌아간다. 이것은 인간의 축복이자 불행일 수 있다. 축복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그 중 기억하고 싶은 것, 기억해야 하는 것을 (메모, 사진, 나의 mental focus등을 이용하여) 다시 되새겨보며 머리 대신 마음에 간직한다. 마음에 저장한 것은 더 오래 가는 것 같다.

9. 다음 목적지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다.



이런 여행은 마음이 굉장히 잘 맞는 두 명, 또는 오히려 즉흥적인 몇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능하겠지만 보통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면 나만의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적어진다. 그게 단점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만큼 새로운 즐거움과 소중한 경험이 마음 속에 남으니까. 하지만 취향에 따라 이런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모든 사람은 이런 외출이 가끔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시 내가 어느 곳을 혼자 여행하는 것이 좋다고 찝어서 추천해주길 기대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고작 10개월의 런던대학 교환학생 경험 끝에 런던 최고의 장소를 선별해 줄 자격도, 대담함도 나에게는 없다고. 다만 어떻게 여행하는 것이 제일 즐거웠는지 나의 경험을 털어놓을 수는 있다. 목적지의 규모도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예를 들어, 나는 서점 하나를 방문하거나, 박물관의 한 개 층을 방문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하루에 몇 군데 씩이나 돌고도 멋진 여행을 해낸다.) 감히 말해놓고 만족감을 줄 지신도 없다. 하지만 한가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위에 1번부터 나열한 순서로 홀로 여행을 한다면 느끼는 것, 얻는 것이 많을 것이라는 것.



어디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어느 나라의 어느 지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알려주는 가이드북에 코를 박은 여행은, 스무살 쯤의 나이가 되면 더 이상 만족하기도 힘들고 진심으로 마음의 울림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여행이란, 단지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WHERE을 정한 후,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혹시 '여행을 왜 가느냐'라는 질문에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여 시야를 넓히고 내적 성숙 또한..' 식의 대답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런데 이상하게 2주 유럽여행 후 지식은 늘었지만 (이젠 머리 속에 지역의 이름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많아졌지만) 내면의 내가 성장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과정과정마다 충분히 마음을 쏟거나 생각을 많이 하는 여행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다못해 종로 거리를 과정을 밟아가며 여행해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도 여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차이는 다만 내 시야와 태도에 있을 뿐.